2025. 6. 2. 19:27

재미있었다.

 

 

밑줄긋기

 

1. 역사를 알면 알수록 제가 살아가는 이 시대와 공간이 누군가의 시간과 재산, 심지어 삶 전체를 바쳐 만든 연대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각자도생의 시대라 말하지만 나의 삶이 홀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2. 안창호는 미국에 이민가서 외국인 노동자가 되었는데, 오렌지를 정성껏 따면 낙과가 줄 것이고, 낙과가 줄면 오렌지 농장주가 좋아할 것이고, 그러면 한국인에 대한 신뢰가 쌓여 취업도 수월해질 것이고, 언젠가 한국이 독립을 호소할 때 미국인들이 지지해줄 것이라고 이야기함.

 

3. 나라면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했을거야! 장담하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거와 다르다. 우리나라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났고 신분제도 사라졌다. 국민 대다수는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 

다른 시대에 나고 자라 전혀 다른 고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이전 시대의 과제를 마주한다면? 독립운동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처절하게 고민할 기회자체가 없었으니 선뜻 하겠다고 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못 하다고 하는 게 당연하다. 

만약 나였다면? 이라고 상상하며 자신에게 실망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막상 그래야 할 순간이 찾아오면 나도 모르게 그 현장에 서 있게 될 수도 있다. 현장에 나가게 만든 동력은 역사에서 나온다. 

내가 그런일을 할 수 있을까? 라고 질문을 던지는 것보다 "그런 일이 있었다"라고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기억하는 것, 그리고 역사 속 사람들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역사적으로 사는 길이다. 

 

4. 1902년, 하와이에서 일할 노동자를 모집했다. 전 세계적으로 설탕 수요가 폭증했기 때문. 사탕수수 공장이 활황을 맞았는데 일할 사람은 부족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채권을 팔았다. 채권이란 우선 팔아서 자금을 조달한 다음, 정해진 기한 내에 이자를 더해서 갚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 독립할지 기약할 수 없는 나라의 채권을 누가 사겠는가? 하와이 사탕수수 공장의 이주 노동자들이 기꺼이 독립고채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주 노동자들은 일요일 제외 하루 10시간씩 노동했다. 그때 받은 평균 월급이 17달러 정도였다. 미주 지역 한인 숫자는 1만여명에 불과했지만 독립자금은 거의 다 이 지역에서 나왔다. 상하이에 있는 임시정부 청사 건물도 안창호가 미주 지역에서 모아온 독립자금으로 빌린 것이다. 

 

5. 1924~1918년까지 이어져 무려 4000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제 1차 세계대전.

도화선이 된 사라예보 사건,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노린 암살 사건으로 황태자와 부인인 황태자비가 암살단원의 총에 맞아 숨졌다. 오픈카를 타고 식민지?였던 보스니아를 방문했다가... 범인은 19살의 보스니아 청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위임통치하고 있었다. 

원래는 오스니아제국의 지배를 받던 보스니아,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다시 받게된 것. 우리나라 일제강점기 이후 강대국들이 한반도를 신탁통치하려고 했던 형태와 비슷하다. 보스니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를 좋게 볼 리 없었다. 

암살범의 배후에 세르비아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함. 

세르비아 같은 편 러시아가 끼어들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동맹국 독일이 끼어듦. 영국 참전하면서 동맹이었던 일본도 참전함. 오스만제국, 이탈리아, 나중에는 미국까지... 제 1차 세계대전!

 

6.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보스니아 통치를 지지했다. 게르만 민족끼리 뭉친 것.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이고 남슬라브 민족 국가 건설이라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7. 제 1차 세계대전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충돌이었다.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일어날 필연적인 결과엿던 것이다. 

 

8. 동독사람들이 정신적, 경제적 자유를 찾아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하자 장벽을 세워 이를 막으려고 했다. 헝가리로 여행이 가능해지자 이곳을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1989년 동독국민의 여행 요건 완화 계획에 대해 발표하던 정치국 대변인 샤보브스키,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여행이 자유화되냐고 질문했는데 즉흥적으로 "지금부터"라고 대답함. 사람들이 베를린 장벽으로 모여들어 벽을 부쉈다. 샤보브스키가 말실수를 하지 않았더라도 베를린장벽은 무너졌을 것. 

 

9. 기네스북에 등재된 선박 '메러디스 빅토리호' 가장 많은 인원을 구한 단일선박. 60명이 정원인 배가 무려 1만 4000여명을 구출했다. 정원의 230배나 사람을 태운 것이다. 1950년 흥남철수작전. 중국에서 북한에 지원군을 보내며 국군과 유엔군은 후퇴를 결정함. 군인과 군수물자를 배에 실어 가려고 했고 민간인의 목숨은 고려하지 않았다. 현봉학 박사가 작전을 지휘하고 있던 에드워드 알몬든 장군을 강하게 설득했다. 군수물자 대신 피난민을 태우기로 결정하고 군수물자 25톤을 버리고 피난민 1만 4000여명을 배에 태웠다. 

 

10. 2021년 8월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로 260만명의 난민 발생. 우리나라의 미라클 작전으로 400여명의 인원을 구출했다. 

 

11. 레미제라블의 배경: 1789년 바스티유 감옥 무너뜨리고 루이 16세를 단두대에 처형한 그 때가 아니라 이로부터 43년 후인 1832년 6월에 발생한 민중봉기가 배경이다. 1789년 시작하여 1830년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입헌군주제를 수립한 7월 혁명, 1848년 다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수립한 2월 혁명까지 약 60년 동안 혁명의 시대가 이어졌다. 

 

12. 프랑스의 가장 높은 신분인 성직자와 귀족은 2%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들이 땅 50퍼센트를 차지하고 세금도 평민들에게 내게 했다. 세금도 안내면서 사치를 부렸고 왕은 귀족에게 돈을 빌리고 농민들에게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조권을 주었다. 귀족들은 왕에게 빌려준 돈을 회수하고 자기 호주머니까지 채우고자 농민들을 쥐어짰다. 

 

13. 혁명으로 프랑스 귀족들이 살해당하고 왕까지 처형당하자 유럽의 다른 군주들이 충격과 공포에 빠져 프랑스를 상대를 전쟁을 벌이고 이때 등장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다. 

 

14. 나폴레옹은 전쟁에서 연이어 승리하여 영웅이 되지만 러시아와 워털루 전투에서 패했다. 1815년 완전 몰락하게 됨. 그 이후 루이 16세 동생들이 돌아와 차례로 즉위하여 프랑스 혁명 이전으로 돌아감. 

 

15. 샤를 10세가 욕심을 부리고 절대왕정을 수립하려고 하자 분노한 민중은 다시 혁명을 이으킴, 1830년 7월 혁명, 다시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16. 판틴은 장발장의 공장에 취직했지만 모함으로 억울하게 해고되고, 이후 머리카락과 생니를 팔다가 결국 몸까지 팔게 되었다. 어린 딸 코제트를 두고 죽게 된다. 

 

17. 이틀 동안 벌어진 시가전으로 사상자만 800여명, 이 봉기는 이틀 만에 진압되고 혁명은 실패했다. 

 

18. 혁명에 실패해 목숨을 잃은 이들이 나와 부르는 노래.16년 후 2월 노동장 계급이 중심이 되어 왕정을 끝내는 2월 혁명에 성공하였다. 이 혁명으로 프랑스 임시 정부가 수립되고 새로운 공화국이 선포된다. 이 희망의 단초가 되었던 것이 '레미제라블'의 배경인 1832년 6월 혁명이다. '6월 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절망하지 마라. 우리의 목표, 그리고 꿈은 이루어진다. 

 

19. 세종대왕 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 - 김득신, 같은 책을 11만번 읽었다. 머리가 좋지 않았고 기억력이 엄청 나빴다고 한다. 소과는 수능, 대과는 고시 같은 것, 그걸 다 통과해야 관리가 된다. 과거는 3년 마다 보고 33명만 합격해서 경쟁이 엄청나게 치열했다. 39에 소과에 합격했다. 20년이 지나 대과에 합격한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 하여 스스로 한계 짓지 마라. 나보다 어리석고 둔한 이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

 

20.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와 달리 유교 경전 읽는 것보다 그림 그리거나 무예 익히는 것을 더 좋아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는데 이랬다저랬다(왕의 의견에 따르면, 왜 네 의견이 없냐? 자기 의견 내면, 왕을 무시하고 왜 네 맘대로 하냐? 이런식...) 하며 사도세자를 괴롭혔다. 우울증과 화병에 시달리던 사도세자는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 온갖 기행을 일삼고 내시와 궁녀를 죽였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하고 못하자, 뒤주 안에 가둬서 일주일 괴로워하다가 생을 마감하였다. 임오화변, 조선 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뽑힐 만하다. 

 

21. 사도세자의 부인이자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는 정조에게 아버지의 한을 푸는 일은 복수가 아니라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조가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 볼 수 있또록 끊임없이 강조하였다. 연산군처럼 생모의 원수를 갚겠다며 조정에 피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반대세력을 숙청하지 않았고 탕평정치를 펼치며 조선후기의 르네상스를 완성했다. 

 

22. 의자왕은 왕위에 오르고 복수를 감행한다. 642년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직접 전쟁에 뛰어든다. 나제동맹을 맺었는데 신라가 약속을 깨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해버렸고 성왕은 신라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전장에 뛰어들지만 매복 중이던 신라군에게 패하고 참수당한다. 관산성 전투...잘린 성왕의 머리를 신라 궁궐 계단 아래에 묻어 궁을 드나드는 사람이 백제 왕의 머리를 밟고 다니게 만들었다. 

의자왕은 88년 만에 신라의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원한을 갚았다. 의자왕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을 죽이고 시신을 돌려주지 않았다. 

 

23. 이번에는 김춘추가 복수심에 불타오르고 당을 찾아가 협조를 구한다.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태종무열왕이 되고 딸을 잃은지 18년 뒤, 황산벌전투에서 의자왕의 큰아들 부여융을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모욕한다. 패자에 대한 예우를 지키지 않은 것이다. 

 

24. 황현: 조선을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 정승의 후손이다. 썩은 조정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 1864~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역사를 쓰고 위정자들의 잘못이나 조정의 행적을 서슴없이 비판한다. 그 책이 '매천야록'이다. 이 책을 쓴 후 황현은 술에 아편을 타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신이 국가에 녹을 먹은 사람도 아니고 나라에서 자신을 위해 해 준 것도 없지만 500년이라는 시간을 이어온 왕조가 끝나는데 그 왕조가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만든 선비 문화의 수혜자 중 한 명도 죽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기 때문에 자결을 선택한 것이라고 말한다. 

 

15. 황현과 달리 출신이 미천했던 최재형, 아버지는 소작농이고 어머니는 기생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연해주로 떠났다. 경술국치 이후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시작한다. 민족지를 발행하고 독립운동단체도 세우고 안중근 의사의 항일활동을 후원한다. 1920년 연해주에 사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핑계로 일본은 연해주를 공격하고 최재형을 체포해 사형시킨다. 나라에서 아무것도 받지 못한 사람이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16. 우씨왕후: 고구려 제9대왕 고국천왕의 부인, 왕의 서거 후, 왕의 형제들을 찾아가서 서로 협상을 하고 왕의 동생과 결혼해 2대에 걸쳐 왕후가 되었다. 여성으로서 시대의 한계는 있었지만 자신이 주도권을 잡고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움직였다. 

 

17. 선화공주는 서동과 결혼했다. 서동이 선화공주와 결혼하기 위해 헛소문을 냈는데 지금으로 치면 악성댓글, 명예훼손 등 큰 범죄인 셈이다. 서동과 어쩔 수 없이 결혼한 것이 아니라 본인이 선택했다. 

 

18. 한명회: 경덕궁 궁지기로 관직 생활을 시작함. 수양대군에게 인생을 걸기로 했다. 수양대군은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로 형 문종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어린 조카가 왕위에 오르자 왕이 되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일으켜 고명대신(김종서 등)과 안평대군(동생)을 없애버리고 단종을 폐위한 후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그 유명한 살생부가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한명회가 만든 반대파를 숙청하기 위한 리스트로 살릴 사람은 생, 죽일 사람은 살이라고 죽었다. 

9급 공무원에서 14년 만에 국무총리 정도 된 셈이다. 

 

 

한명회는 자기 딸을 세조의 둘째 아들과 결혼시키고 그가 예종이 되었는데 일찍 죽었다. 넷째 딸은 세조의 둘째 손자와 결혼했는데 성종이 되었기 때문에 또 왕의 장인이 되었다. 

 

훗날 연산군의 명령으로 부관참시 당한다.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이 자신의 생모인 윤씨를 폐비시킬 때 찬성하거나 방관한 신하들을 모조리 죽이는데, 이미 죽은 사람에게는 부관참시라는 벌을 내렸다. 무덤을 파헤쳐 목을 베는 형벌로 한명회의 끝은 참으로 비참했다. 

 

19.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이야기를 해서 연산군을 폭주하게 만들어 피의 복수국 '갑자사화'가 벌어진다. 둘째 아들 임희재가 연산군의 만행을 비난하는 시를 짓고 임사홍은 자기 아들을 죽이는데 동의한다. 임사홍은 중종반정을 일으킨 군사들에 의해 죽임당했다. 한명회와 비슷한 결말을 맞은 것인데 역사를 알아도 같은 잘못을 반복한 것이다. 

 

20. 이스탄불: 동서양의 교차로, 해협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유럽, 동쪽은 아시아로 나뉘어서 한 도시 안에서 아시아와 유럽을 마주보는 셈이다. 

 

오스만제국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렸는데 이슬람 국가 수장으로서 기독교 국가인 비잔티움제국의 심장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고자 한 것이다. 

70여척의 전함을 하룻밤 사이에 산으로 이동시켰다.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꾼다. 이후 약 200여년간 오스만제국의 전성기가 열린다. 

 

21. 베네치아 공화국은 제노바 공화국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했다. 오늘날 가장 많이 이익이 나는 기술이 반도체, 인공지능이라면 당시 유럽에서는 후추가 가장 돈이 되는 물품이었다. 후추를 넣기만 하면 고기의 맛과 향이 업그레이드되니까 너도나도 후추를 사고 싶어했다.  후추값은 인도에서 출발할 때 가격의 50배가 되었다. 베네치아 상인은 이 후추를 유럽 각국에 팔았다. 유럽에서 후추는 금값(실제로)이었다. 포르투갈은 아라비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인도에 직접 가서 후추를 직거래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콜럼버스였다. 모두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로 돌아갈 방법을 탐구하고 있을 때 콜럼버스는 특이하게 서쪽 항로를 개척하려 했다. 서쪽으로 지구를 한 바퀴 돌면 인도가 나올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콜럼버스 같은 사람은 일종의 벤처기업인데 사업계획을 제출하고 투자를 끌어와야 한다. 여기저기에서 거절당한 콜럼버스는 스페인으로 간다. 콜럼버스 일행은 두 달 정도 항해 끝에 육지에 도착한다. 콜럼버스는 자기가 인도에 도착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곳은 북대서양에 있는 바하마 제도였다. 당연히 후추가 있을 리가 없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아프리카 대륙 남쪽에 있는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갔다. 콜럼버스와 달리 진짜 인도로 간 것이다. 신항로 개척이라는 포르투갈의 꿈이 약 80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후추를 가져가는데 원정비용의 60배의 이익을 올린다. 양쪽 모두 이익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한데 유럽은 내다 팔 게 없었다. 그러자 포르투갈은 거래를 포기하고 착취를 선택한다.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총으로 빼앗와 왔다. 다른 국가들도 이런 방식을 택하면서 제국주의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22. 스페인은 1545년에 후추 대신 남미에서 은광을 발견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은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구으로 흘러 들어간다. 스페인은 남미의 은을 중국에 팔고, 중국의 물건을 들여와 유럽에 판다. 

 

23. 스페인은 가톨릭을 위한 전쟁도 불사한다. 주변 여러 국가들과 종교 전쟁을 벌였고, 전쟁에 막대한 돈을 쏟아부으며 세 번이나 파산하게 된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오는 물자도 소용없을 정도였다. 

상업과 유통에 밝은 유대인들은 모두 네덜란드로 떠나버렸다. 

 

24. 영국은 인도에 동인도회사를 세우고 면직물을 비롯한 인도의 물건을 사고 팔았다. 증기기관까지 발명되면서 영국의 방직 산업은 압도적으로 성장하고 산업혁명이 도래하며 제 1차세계대전이 열리기까지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명성을 누리며 대영제국의 시대를 열었다. 

 

25. 시대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가진 인물: 만적, 고려 시대 사람으로 무신정변 이후 최충헌이 집권하던 시기의 인물, 장상에 어찌 타고난 씨가 있겠는가? 우리들이라고 어찌 뼈 빠지게 채찍 아래에서 고통만 당하겠는가?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는 세상을 뒤엎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우리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신분해방운동, 천민이라는 신분을 없애버리겠다! 너무나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만적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 않자 거사를 4일 후로 미루었고 순정이라는 노비가 자신의 주인에게 이 사실을 고하면서 만적의 봉기는 실패로 돌아가고 모두 죽임(수장)을 당한다. 순정은 천민의 신분에서 벗어난다. 수십만명의 노비를 해방시키기 위한 봉기가 단 한 명의 노비만 해방된 채로 끝난 것이다. 

 

26. 토정비결, 음양오행, 육십갑자에 따라 길흉화복을 점치는 것: 토정 이지함 선생.

점괘는 대체로 좋은 내용이다. 백성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메시지처럼 여겨졌다. 

명문가 자손이었지만 나라의 산업이 농업에만 국한되어서는 안되고 상업이든 수공업이든 활발하게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8세기에 실학자들이 했던 주장을 한거니까 약 200년이나 앞선 생각이었다. 성리학 시대의 양반으로서의 체면을 다 내려놓은 것이다. 직접 장사를 해서 큰 돈을 벌어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27. 율곡이이의 '기자실기'는 우리 나라의 문명이 중국 상의 왕족이었던 기자에게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였음에도 그런 역사관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 시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28. 성리학의 핵심: 분수에 맞게 살라. 양반은 양반답게, 노비는 노비답게, 각자 신분에 맞게 살라는 것, 현대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권문해는 '대동운부군옥'이라는 우리나라에 관한 다양한 지식이 담겨있는 책을 발행한다. 

 

29.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발해와 고구려 역사에 관한 책이 발간되었다. 유득공의 발해고, 안정복이 쓴 동사강목 등. 

발해와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중국 땅에 위치했던 역사이기 때문에 감히 우리가 입에 담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70프로...

 

 

Posted by 이니드417